호랑이

고양이과에 속하는 포유동물. 범이라고도 하며 학명은 Panthera tigris altaica(TEMMINCK)이다. 호랑이는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로 선정될 정도로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다.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며 그 밖의 여러 설화를 비롯하여 그림과 조각 등 미술품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주역》에서 호랑이의 방위를 지칭하는 인방(寅方)도 만주와 한국을 지목하는 동북방인 것을 보면 한민족과 호랑이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하겠다.

호랑이의 형태를 보면 등쪽의 색은 암적황색이고, 사지에 이르러 약간 담색이 된다. 등쪽에는 불규칙한 검은 무늬가 많이 있으나 앞다리와 앞면에는 적다. 주둥이 끝은 암연피색(暗軟皮色)이고 눈과 뺨 밑은 흰색이며 검은 점이 있다. 머리 위와 등의 뒷부분, 복부와 뒷다리에는 뚜렷한 갈색 반점이 있다. 겨울털은 여름털에 비하여 담색이고 길며, 수염은 백색이다. 성체의 몸길이는 180cm,꼬리길이는 87cm에 달한다. 호랑이의 생태를 보면 고양이속의 여러가지 성질과 습관을 지니고 있으며, 동작이 매우 빠르고 매사에 조심성 있게 행동한다. 먹이를 찾아서 하루 동안 보통 80∼100km를 달린다. 보폭은 80cm에 달하며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뛰는 것이 매우 빨라서 한번의 도약이 4m에 달하며 다른 야생동물을 쫓아갈 때에는 10m까지도 뛰어내린다.

교미시기와 교접은 12∼1월 초순경에 시작되며, 젊은 호랑이는 2주일간 늦어진다. 이 시기에 수컷은 이산 저산 숲이란 숲은 모조리 뒤져서 암컷을 찾아 헤맨다. 수컷 여러 마리는 암컷 한마리를 두고 큰 투쟁을 벌인다. 임신기간은 98∼110일이며 1회의 새끼 수는 3마리이다. 암컷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로 된 동굴이나, 바위와 바위 사이에 움푹 팬 곳, 절벽의 동굴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갓난 새끼는 어린 고양이 크기이지만 성장속도는 매우 빠르다. 2개월이 경과되면 어미는 먹이를 운반하여다가 육식동물로서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훈련을 시작한다. 6개월간 젖을 먹이며, 매일의 일과로서 짐승을 잡는 기술을 연마, 습득하게 하여, 9개월째부터는 어미 호랑이와 동반하여 수렵을 하기 시작한다. 새끼들은 1, 2년간 어미 옆에 머무른 뒤 서서히 독립생활에 들어가지만, 어미 호랑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는 앉는다. 3년 뒤에야 좋은 서식장소를 찾기 위하여 방랑하기 시작한다. 호랑이는 생후 5년이 되어야 비로소 성숙하며, 수명은 40∼50년이다. 1년에 두번 털갈이를 하는데 그 시기는 9월과 3월이다. 검은 줄무늬와 코와 발의 털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빨리 털갈이를 하며 털갈이 기간은 약 2주간이다. 또, 길고 날카로운 발톱도 매년 바뀌며, 바뀌는 시기는 12월경이다.

호랑이의 식성은 자기자신이 잡은 신선한 야생동물의 고기만 먹는데, 시장기가 날 때에는 죽은 고기, 오래된 고기도 먹는다. 주식물은 멧돼지이며 노루·산양·곰·사슴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덤벼들어 잡아먹는다. 소화작용을 돕기 위하여 여름부터 가을에는 여러가지 과실, 즙액이 많은 머루·다래 같은 것도 잘 먹는다. 때로는 물가에 내려가서 물고기도 잘 잡아먹는다. 음식을 충분히 먹은 뒤에는 산골 냇가로 내려가서 코와 입을 물속에 담그고 입 속에 남은 고기부스러기와 피를 깨끗이 씻는 습성이 있다. 겨울에는 물을 얻기가 어려우므로 물 대신 눈으로 목마름을 면한다.

호랑이의 분포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일대, 중국 동북지방의 소흥안령 일대와 소련의 극동지방, 연해주의 흑룡강 계곡 등에 극히 일부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전에는 백두산 고준지대(高峻地帶) 원시산림과 바위동굴에서 볼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시베리아의 연해주 일대의 원시 산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극동지방의 분포권내에서는 약 200마리가 생존하리라 추정하고 있다. 소련 극동지방에 60∼70마리, 북한에 40∼50마리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거는 희박하다. 현재 동물원에서 기르고 있는 개체는 약 150마리로 집계되었는데, 이 가운데 수컷이 약 70마리, 암컷이 약 80마리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수컷 39 마리와 암컷 46마리 및 어린 새끼 등 87마리는 야생이 아닌 동물원에서 출생한 것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경동물원에서는 소흥안령과 장백산에서 포획하여 다른 동물원에 분양을 해주었다. 또한, 소련도 1963∼1964년 사이에 약 15마리를 생포하여 다른 동물원에 수출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모두 25마리가 포획되었다.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상북도 경주군 대덕면에서 수컷 1마리,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를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멸종되고 말았다. 국제자연보존연맹의 적색자료목록에 제108호로 수록된 국제보호동물이다. 한편 1994년 김영삼대통령의 중국방문 기념으로 중국에서 백두산 호랑이 한쌍을 보내와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사육하고 있다.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으로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호랑이가 인간에게 끼치는 민폐가 매우 심하여 호랑이에 의하여 사람이나 가축이 해를 입는 환난을 일컬어 ‘호환’이라고까지 칭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885년(헌강왕 11) 2월에 호랑이가 궁궐 마당으로까지 뛰어들어왔다고 하였으니, 호랑이의 피해가 나라 전체에 걸쳐 매우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를 야성의 맹수로 인식하는 것은 단군신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결국 호랑이는 그 야성을 순화시키지 못하고 동굴 속에서 뛰쳐나와 맹수로 머무르고 만다.

이렇게 인간에게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본능은 급기야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게 되어 살아있는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고 제사까지 지내는 풍속이 오랜 옛날부터 행하여졌다. 《후한서》 <동이전> 예(濊)조에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풍속은 원시 부족국가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에서 도당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호랑이 숭배사상은 산악 숭배사상과 융합되어 산신신앙으로 자리잡게 된다. 즉, 산을 숭배하는 사상은 산속에 사는 숭배의 대상인 호랑이와 연계되어 산신이 호랑이로 표현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별칭하여 산군·산군자·산령·산신령·산중영웅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이러한 사상이 엿보이고 있다. 오늘날에도 심마니들은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깍듯이 대접하고 있다. 그러나 산신을 모셔놓은 산신당에는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호랑이 자체가 산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산신도에 묘사되고 있는 호랑이는 무섭고 사납기보다는 점잖고 친근하게 표현되고 있다. 호랑이의 자세도 공격적이거나 서 있기보다는 산신의 옆 또는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도에서의 호랑이 의미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의 군자 호랑이는 엎드려 있어도 모든 헤아림이 그 속에 있다.”라는 말에서와 같이, 호랑이의 엎드린 자세는 산신의 신지(神知)를 받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어떻게 관장할 것인가를 헤아리고 있는 사려 깊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랑이는 일찍이 풍수설에서도 중요시되어 왔다.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는 우주를 진호하고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을 방위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서방의 신이 ‘백호’로서 호랑이로 되어 있다. 또한 무덤을 쓸 때에는 좌청룡·우백호를 보아 자리를 정하고, 무덤을 보호하는 능호석에는 12지신의 하나로 호랑이상을 새겼으며, 무덤 앞의 석물에도 호랑이상을 조각하였다.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서의 4신은 풍수에서뿐 아니라 군대의 깃발과 포진에도 응용되었다.

한편 우리 설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첫번째는 고려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설화에서와 같이 신령하고 신통한 능력을 지닌 영물로서 표현되는 경우이다. 왕건의 선조가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하여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 한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였다. 친구들과 의논하여 웃옷을 벗어 던진 뒤 호랑이가 물어올리는 옷의 주인이 희생을 당하기로 하였는데, 호랑이가 왕건의 옷을 물어올려서 약속대로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의 차이로 살아나게 되었으며,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현(金現)의 설화에서와 같이 호랑이가 자유자재로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과 교유한다는 내용이다.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던 김현은 한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호랑이가 변신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현이 소녀를 따라 호랑이굴로 들어가자 소녀의 형제 호랑이들은 잡아먹으려 하였으나 소녀의 기지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호랑이의 살생에 대한 천벌이 멀지 않음을 감지한 소녀가 김현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형제를 살리고 김현에게도 공을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다. 세번째는 인간의 행위에 감동된 호랑이가 인간을 도와주는 경우, 또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는 경우이다. 호랑이와 의형제를 맺고 호랑이의 도움으로 장가도 들고, 어머니의 묘자리도 좋은 명당을 차지한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와는 달리 호랑이와 토끼의 설화는 호랑이의 어리석음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유형에 속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토끼의 말에 속아 강변에 가서 꼬리를 물에 담그고 많은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리다가 물이 얼어붙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만다는 것이다 . 이상의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상을 살펴보면, 한국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두려운 맹수로서 두려워하면서도 친근한 동물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호랑이가 사된 귀신을 물리치는 신통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을 비롯하여 일반 민가에서도 호랑이의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여 사된 것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벽사(벽邪)의 염원은 삼재(三災)를 막는다는 호랑이 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재는 바람·물·불에 의한 재난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정초의 세화나 부적에 호랑이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바탕으로 벽사행위의 완성을 꾀하려는 의도라고 추측된다. 또,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까치와 호랑이의 그림도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무관의 표시로 관복의 흉배에 호랑이를 수놓았기 때문에 민가에서는 호랑이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길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랑이의 그림이 많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호랑이는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이용되기도 하였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호랑이의 각 부위가 약재로 이용되고 있다. 즉, 뼈는 사악한 기운과 병독의 발작 등을 멈추게 하여 풍병의 치료제로 쓰이고, 눈은 마음이 산란한 환자에게 쓰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광을 발하는 호랑이의 눈에는 사귀도 놀라 달아나게 되어 마음을 진정시키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호랑이의 코는 미친병의 치료와 어린이 경풍에, 이빨은 매독이나 종기의 부스럼에, 발톱은 어린이의 팔뚝에 붙은 병도깨비를 물리치는 데, 털가죽은 사악한 귀신을 놀라게 하여 학질을 떼는 데, 수염은 치통에, 오줌은 쇠붙이를 삼켰을 때 사용되었다. 호랑이의 털가죽을 신행 때 신부의 가마 위에 덮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호랑이가 지닌 벽사적 의미에서 실시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시 인간의 즐거움을 시기한 잡귀가 새색시를 넘보기라도 할까 보아서 미리 잡귀의 범접을 막고자 한 의도이다. 이것은 호랑이의 발톱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부녀자들이 패용한 데에도 나타난다. 한편, 단옷날에는 궁중에서 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속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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